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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규/ 소행성 외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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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2-01 12:10 조회2,6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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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행성


   신철규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의자만 뒤로 계속 물리면 하루 종일 석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너와 나는 이 별의 반대편에 집을 짓고 산다.
내가 밤이면 너는 낮이어서
내가 캄캄하면 너는 환해서
우리의 눈동자는 조금씩 희미해지거나 짙어졌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고 지나친 유성에 대해
행성의 반대편에만 잠시 들렀다가 떠난 외계인들에 대해.
너는 거짓말하지 마, 라며 손사래를 친다.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우리는 금세 등을 맞대고 있다가도 조금씩 가까워지려는 입술이 된다.

지구의 둘레만큼 긴 칼로 사람을 찌른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질까.
죄책감은 칼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2017)

눈물의 중력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못 박힐 손과 발을 몸 안으로 말아 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2017)
                                                  

불투명한 영원

 


손바닥을 종이에 대고 펜으로 손의 윤곽을 따라 그린다
손목 위쪽은 닫히지 않는다

바닥에 찍힌 십자가 그림자
우리는 수수께끼 앞에 서 있다

해변으로 밀려오는 손목들
불붙은 커튼

하늘은 주먹으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나무들은 게으르게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는 슬픔

물속에 손을 넣으려고 하면
손을 잡기 위해 떠오르는 손이 하나 보인다

시계에 물이 찼다
기도가 끝났다
                                              ―≪서정시학≫ 201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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