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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몽상 4 / 이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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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23 03:28 조회2,9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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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몽상 4

                 이성렬​

 

 

이 형상들은 아름답지만 소멸될 것이 분명하므로 희망 없이 사랑해야 할 것이다. - 알베르 까뮈, 쟝 그르니에의서문에서

    

 

 

얼마나 많은 공손한 숨결들이 우연의 몫으로 하사된 단검을 공중누각의 처마에 꽂은 후 비밀의 화원으로 사라져갔을까?

운명을 드러내려는 것들의 비의는 바람의 허벅지에 새겨진 연비聯臂로 가득하다

 

그 가을날 나는 비원에서 개미마을까지 시간의 궤도를 따라 순례할 수 있었다

 

1802년의 횔덜린이 보르도와 슈투트가르트 사이의 먼 길을 터벅터벅 걸었던 것처럼

구두주걱으로 발가락에 돋은 녹조의 각질을 긁어내며, 지갑 속 금화들을 공원의 비둘기에게 뿌려준 뒤에

 

A입구에서 숨을 고른 뒤, 오래된 편지를 손바닥에서 벗겨내어 우체통에 넣었다

옛 주소가 박힌 노란 봉투는 늙은 지문을 접은 채 노숙할 채비를 하였다

 

B의 식당가 초입에서 로봇춤을 추는 명랑한 청년들의 허리춤에서 양철 담낭이 빠져나와 빗물구멍으로 굴러 내렸다

 

C번지의 관청 옥상, 모략과 배신에 뒤진 패거리의 고환 무더기가 서류분쇄기에 갈린 후 흩뿌려졌다, 청소차의 굉음을 향하여

 

D의 방송국 앞, 유명 연예인에 영혼을 청탁하러 온 군중이 환성을 지르며, 자욱한 배기가스로부터 솜사탕을 자아내었다

 

E대학 구역의 건널목에서 내 곁에 유령처럼 불쑥 솟아난 검은 치마의 여자, 거리에 흩어져 있던 농염한 연애의 파장들이 겹친 순간에 태어난 듯

그렇게 근거 없이 생겨나도 괜찮겠냐고, 옛 애인을 닮은 그녀에게 말했다

 

지난 밤 그녀의 탐스런 가슴이 완성된 시각을 묻자, 달뜬 얼굴을 숙인 그녀의 심장이 홍관조로 우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FG가 갈라지는 H교차로에 문득, 철거된 고가도로가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공사장의 붉은 벽돌들을 한 개씩 집어 삼키며, 지하묘지에 이르는 계단으로

 

얼마나 순한 목숨들이 두 눈에 사슬을 감은 채로 그 길을 까마득하게 내려갔을까?

 

형상을 이룬 것들의 윤곽은 언제나 폐곡선을 그린다: 눈을 부릅뜬 J상점의 박제 부엉이가 중얼거렸다

지지난 세기에 멸종된 도도새 무리가 다른 행성에서 몰려와 지하철 3호선 K 구내에서 새우잠을 잤다, 시간-에너지의 불확실성 원리에 익숙한 대학원생은 무심히 지나쳤고

 

다윈에 정통한 행인들은 몹시 거북한 입맛을 다시며 눈알을 빼어 뒷주머니에 넣었다

 

개미마을의 대형 커피샾에는 짙은 페로몬을 내뿜으며 시간의 낱알과 잎사귀를 분주히 실어 나르는 남녀 개미들

 

카페 <매혹>의 문 앞 땅위로 솟은 플라스틱 지하묘비 곁에, 눈가의 다크써클을 붉은 연지로 감춘 여왕개미가 날개를 펼친 당당한 포즈로 앉아 있었다

 

(1/29/2015)

 

<Position>, 2017년 봄

                                 

 

 

 

 

 

 이성렬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2002서정시학등단.

2013<문학청춘 작품상> 수상

시집비밀요원, 밀회

산문집 겹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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